Kim Seong-min
돌담 소리疏籬
현대사회는 동시대 예술 표현은 새로운 실험의 하나로 예술가들이 하나 이상의 표현방법과 동시에 공감 이야기를 더하는 시기여서 이 시기부터 작품에 미학적, 문학적인 구분이 어려울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대지예술의 정신은 특징을 공유했는데, 여기에는 대상이 어떻게 그들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 인간과 예술작품의 상호 작용, 특히 형태의 단순함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비록 축소된 미학의 채택이 종종 대지예술의 중심이었지만, 예술가들은 전형적으로 문서화와 제작 과정에 직접 관여했다. 이러한 특성들은 대지 예술가와 기획된 프로세스 예술, 설치미술과 같은 미니멀리스트 이후의 경향에 더 많이 일치했다. 주로 실외에서 존재하고 자연과 생활양식이 만들어낸 예술품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일어날 자연 분해와 침식의 대상이 되어 미니멀리즘의 도시적인 현대 미학과는 정반대로 대지예술의 가장 독특한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대지예술처럼, 문화 아카이브는 예술작품이 제공하는 아름다움과 미적 즐거움만이 아니다. 사회적 기억이자 그 사회의 정체성이다. 김성민의 ‘돌담 소리疏籬’는 주류 예술시장을 거부하면서, 대신해 덧없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대부분의 ‘돌담 소리疏籬’는 시각적으로 놀랍고 대화의 중심에는 미학적, 문학적, 사회적 기억, 사회적 정체성 등 이러한 개념들로 더해지고 있다. 이 개념들은 무의식적이며 일상화된 예술의 행위와 연결을 강조하며, 작가 김성민의 시각적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김성민의 ‘돌담 소리疏籬’는 두 가지 개념의 ‘소리’와 ‘疏籬’에서 출발한다. 성근 돌담 울타리에 햇살이 비추고 골목길 모퉁이 고요하다. 돌담길 따라 들려오는 돌담 ‘소리’는 기억을 추억하고 흔들리는 돌담 ‘疏籬’는 기억의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돌담길, 그래서 더 많은 숨은 이야기와 기품있는 돌담길을 ‘소리’를 통해 관찰할 수 있고 오늘날 보존되고 기록되는 생활공간의 창의적인 예술가를 발견하며, 이 예술가의 소재는 돌, 물, 자갈, 흙과 같이 자연에서 직접 추출할 수 있는 물질이었다. 결과적인 덧없음과 궁극적인 해체는 통제된 환경에서 세월의 흔적으로 변형, 해체, 보존되는 과정을 거쳐 ‘疏籬’의 형태로 오랜 기억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김성민의 관습적 시각은 활짝 열린 공간에 익숙했다. 그러나 기억적 시각은 훨씬 더 작은 공간과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조형적 시각과 마주한다. 그는 개별공간이 아닌 집단적 공간의 조형미를 관찰하고 이것이 어떻게 조성되었고 어떻게 보존되는지에 관한 관심이다.
‘돌담 소리疏籬’는 시간적 요소를 통해 인간의 체험적 요소를 강조하는 동시에 사회적 기억에 영향을 미친다. 단순하고 조형적인 형태는 늘 덧없는 것이었다. 그 사진들은 그 작품의 일시적인 존재를 기록하지만, 그 작품 그 자체만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들이 단순히 작품의 성과를 표시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문서화’ 과정은 종종 작품의 이야기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때때로 대지 예술가에게 중요하다. 김성민의 작품은 자연이 흐름을 택했기 때문에, 작품 내면에 감춰진 단순성과 덧없음은 기억속 의 ‘돌담 소리疏籬’이다.
stone wall 0002_1 전남 담양군 창평면 외동리. 2005.10
stone wall 1502_ 전남 곡성군 삼기면 청계리. 2018.12
La Gyu-Chae
도란장에서,,,
민초들의 삶의 광장.
장터라는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 환경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뿌리를 상징한다. 산업화 시대의 농촌은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면서, 농촌은 더는 안락한 고향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고향의 향수가 깃든 장터는 길과 길을 이어주는 교통의 연결지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동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장터도 함께 생겨났다.
장터라는 공간은 거리와 공터 중심에 위치해 지역적 문화의 집결체이자 지역을 상징하는 집합체 공간이다. 이 공간의 내면적 구성요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획득하는 개념을 포함하는데 공간에서는 삶의 서사와 그 변화양상을 확인할 수 있고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주장하는 토론공간의 구실을 한다는 측면에서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장터는 사람들과 함께 상업적 교류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에서도 지역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에게 삶의 안부를 묻는 곳이다.
시대의 아카이브와 고전주의 무대의 풍경
라규채의 ‘도란장에서,’ 작업은 사회적 기억이자, 그 사회의 정체성을 기록한 부정할 수 없는 사진 아카이빙 작업이다. 그는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과 필요성으로 오랜 시간 ‘도란장에서,’ 사진 작업을 이어왔다. 이 작업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카이브를 통해 역사를 말하고 있으며, 아카이브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아카이브를 통해 미래를 그리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도란장에서,,,’ 표현된 시끌벅적한 장날, 장터의 풍경은 현실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이해의 충돌이 만연한 장소이다. 이 시끌벅적한 충돌은 삶의 조건에 포함되며 삶의 연속성을 찾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쟁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시끌벅적한 충돌의 현장을 사회적 경쟁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라규채의 ‘도란장에서,,,’는 장날, 장터에 모인 사람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고전주의 무대 풍경으로 표현하고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시끌벅적한 현실적 무대 배경이 있고, 장날이라는 공연에 주인공은 장사꾼이고 조연은 주변의 물건을 사려고 흥정하는 군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라규채의 3인칭 시점은 철저히 대상에 관여하지 않고 대상의 연기를 감상하는 관람객의 시선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 공간은 비평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라규채의 3인칭 시점의 미학적 원리를 포함하는데 그의 연출력은 ‘장날’과 ‘장터’라는 대상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들과 소통하는 또 다른 생생한 2인칭 시점으로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만의 치밀한 상상은 마치 연극의 무대 설치와 같이 시대적 배경들을 소개하고 현실의 배우는 무의식적 연기력을 차용해 고전주의 무대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라규채의 ‘도란장에서,,,’에는 소망과 현실 간 장벽에 현장이 있다. 이 장터풍경에는 문학적 기반과 영상적 기반을 함께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한편의 공연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규채의 사진은 거리와 시장 또한 그 공간적 다양성과 동질성에 의해 장날의 장터풍경을 재현하는 공간으로 시적 형상화가 되고 있다. 그의 관심을 통해 ‘향토성’, ‘민속성’, ‘축제성’, 전통의 재현, 주체와 등장인물 등 탐험하는 경험을 받을 수 있으며 미술의 역사, 문화적 맥락, 미술의 움직임과 추세에 대한 미학을 이해하게 된다
DSCF6082 - 순창장(2006)
DSCF6338 - 곡성장(2006)
Byun Hae Seok
기억에 남다_ to be memorable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창녕이다.
다섯 살 무렵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이후 부산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열일곱 살 무렵 집안에 제사를 모시기 위해 빌린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엄마 따라 내가 태어난 곳 창녕을 부산으로 이사 후 처음 가게 되었다.
그때 내가 태어난 고향의 풍광을 담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다. 이것이 사진과 나의 첫 인연이었다. 그렇게 처음 시작한 사진과의 인연으로 줄곧 사진을 가까이했다.
지금 나의 관심은 내 사진 이야기를 바탕으로 고향의 의미와 개념의 재정립이다. 희미한 기억의 고향 창녕은 남아 있는 몇장의 사진으로 추상화된 관계의 틀 안에서 고향의 향수를 대변하고 현실적 고향 부산의 고향은 근대적인(물질적) 장소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나는 태어난 창녕의 기억은 거의 없다. 이런 이유만으로 진정한 나의 고향은 내가 자란 부산이라고 생각한다. 부산에서는 어릴 때부터 소중한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정리하고 있는 나의 사진 이야기들은 태어난 창녕 시골에서 10대 때 찍은 사진들과 부산에 이사를 와서 자란 곳 주변에서 20대 때 찍은 사진들이다.
“진정 사랑했었던 고향의 기억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 한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때로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그 기억을 생생하게 증명을 해주며 그것들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 이토록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사라질 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훗날 그 기억들이 사라지더라도 사진은 나의 기억과 추억을 대신 해 줄 것이다.
“기억은 짧고 사진은 길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는 이유이다.
변해석_ (1)
변해석_ (7)
Yang youngnam
Granny style_ 엄마, 사물의 경관
‘엄마의 사물’을 통해 한 여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엄마의 사물’은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현재와 과거가 연결되어 일기장 같은 상징들이다. 이것은 스스로 ‘낡고 하찮은 것들’로 스스로 평가되지만 한 여인의 행동, 양식과 사고방식을 대변하며 그들의 물건 모두와 삶의 관계를 맺는다.
일상생활의 필수품인 이불은 한국인의 고유한 생활양식과 전통적 미의식이 잘 나타나 있으며 오늘날에는 거창하게 ‘한국적’이라는 전통 주제로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오래전 엄마의 침구는 만들어질 때부터 가족을 위한 일상생활에 밀착된 생활 도구로 만들어졌다. 엄마의 정성으로 한 땀 한 땀의 바느질을 통해 가족을 위한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Granny style_ 사물의 경관’ 작업은 한가정, 한가정의 가족사를 대변하며 엄마, 즉, 한 여인의 인생이야기를 ‘엄마의 사물’을 통해 엿보고자 하는 작업이다. 흔히 말하는 엄마의 일생과 가정사는 남이 엿볼 수 있는 내용도 아니고 구성원들만 공유하는 사연일 텐데 그 긴 사연들과 엄마의 일생은 한가정의 침구와 함께 기록됐겠다는 사유에서 출발했다. 한 여인의 삶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관습과는 다르게 시대의 변화에도 가정의 포근한 포용력으로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 믿음과 위치의 대상이다. ‘엄마의 사물’ 즉, 이불이 쌓여있는 옷장을 통해 그것들이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 또, 가족관계 안에서 어떤 사유로 보존되었으며, 어떤 필요와 관점에서 상호관계를 맺고 ‘소중함’의 이미지로 구성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다양한 빛깔의 천과 실로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빗어낸 이불은 통해 우리 엄마들의 감춰진 미술적 재능은 동시대 미적 기준에서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불에 나타난 색채, 문양, 조형성 등은 현대 미술의 감각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미적 통찰력을 나타내다. 과거 어려웠던 한국 가정사에서 오롯이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엄마로서의 인생사는 어렵고 고단했을 것이다. 가정사의 중심에 있는 한 여인. 즉, 우리 엄마들의 인생 경관을 ‘Granny style_ 사물의 경관’으로 풀어낸다.
DSC_5064-1
DSC_5070-1
JEE SEON HEE
기억 속의 공간 ‘문방구’
어릴 적 기억은 지금의 자신에게 어린 시절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떤 경험들은 왜 평생 기억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른이 되어서 떠올린 어린 시절의 기억은 놀이, 생일, 친구, 학교 등으로 종종 감정적인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비록 그러한 기억들이 긍정과 부정의 여러 감정을 포함한 사건에 동반되어 나타나지만 그중 많은 기억은 어린 시절의 행복한 경험들로 보존되어있다.
이렇듯 어떤 유형의 사건들이 기억 속에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반영할 수 있다. 비록 주어진 어린 시절은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지만, 주관적으로 그 시절의 기억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 선택할 수 있다.
나의 사진 작업은 어릴 적 친구들과 공유했던 학교 앞 ‘문방구’라는 공간에 대한 기억이다. 나는 ‘문방구‘작업으로 기억을 소환하는 이들이 경험한 ’기억 속의 공간’을 통해 다른 지각을 유도하고자 한다. 기억 속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공적인 기억만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다. 사적 기억과 그 기억으로 재구성되고 재해석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예술의 형태, 그 표면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다. 작업과정에서 얻어지는 즐거움과 행복감, 그들이 놓여있는 사회와 소통한다는 측면에서 작업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 졌다. 매일 학교 앞에서 장승처럼 지켜 주던 문방구는 점차 쇠락의 순서를 밟아가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번 ‘문방구’는 어릴 적 기쁨을 안겨주는 공간인 동시에 그 이면에 물질적 미소유로 생겨난 잠재된 상처를 반응과 소통으로 치유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처음부터 어떠한 결과를 도출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관통하는 시간이 밋밋하지 않고 추억 속 아름다운 기억으로 영원히 살아 있기를 바란다.
남창문구
남창문구1
CHOI, JEONG-HO
응답하라! 1990 마산
마산은 조선 시대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던 조창(漕倉)이 있었던 곳이다. 자연히 관원들과 상인들이 배로 오가면서 상권의 핵심을 약 250년간 이어왔다. 지금의 창동은 조창에서 비롯된 지명이기도 하다. 이후 청일전쟁으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간섭과 친러파의 세력이 확산하자 군산항과 성진항, 그리고 마산항을 개항하였다. 이로써 마산항은 러시아와 일본세력의 다툼 장이 되기도 하였다.
1899년 5월에 개항된 마산항은 경전선. 남해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의 개통과 연안여객선의 기점으로 발전하였고, 197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 종합기계단지가 설치되면서 활발해 졌다. 하지만 “경남의 명동”으로 불리던 마산의 전성시대는 1990년 후반부터 IMF(국제통화기금)의 영향 등으로 급속히 쇠락해 졌다. 한일합섬과 한국철강, 자유 수출지역의 일부 기업들이 파산과 중국진출을 위해 떠나면서 도심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직장의 이동으로 27년 전 마산에 정착했다. 그때만 해도 창동과 오동동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때의 시선들이 지금의 작가로서는 아쉽지만, 다행히 마산개항 100주년을 스스로 기록하기 위해 마산의 주요지역을 기록하여 놓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철강. 한일합섬. 유원산업. 해안도로 쌍용시멘트 타워와 마산항이 매립되기 전 마산만의 풍경을 추억으로 내놓는다.
1999 한국철강
1999쌍용시멘트
Hwang Ha yul
꽃 지고 새 울다 Flowers are withering and birds are crying.
황하율의 (꽃 지고 새 울다)라는 다큐멘터리적 정물은 사물에 깃든 역사의 초상이다.
그가 틈틈이 모은 오브제들을 가지고 오랫동안 관찰하고 숙고했다는 것을 이번 시리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구도자의 길을 걷는 사진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가 사진을 공부하기 위해서 수년 동안 여러 도시로 다녔던 과정도 구도자와 닮아있다.
작품에서 보이는 1992년에 발행된 출장 신청서에는 계원의 도장과 과장의 사인이 들어가 있는데 너무 낡은 나머지 촬영 직후에 부서졌다고 한다. 87년에 발행된 재향군인회의 종신 회원증, 그리고 84년에 발행된 문서에 빼곡히 적혀있는 한자 이름들, 그리고 그 문서를 작성하느라 쓰인 소박한 펜과 잉크 병… 그의 사진들을 보다 보니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서 과거로 떠나는 여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텅스텐 생산 국가 중 하나였다. 중석은 바로 텅스텐을 얻는 귀중한 광물자원을 부르는 명칭인데, 대한민국이 자동차도 반도체도 초보이던 시절 중석 산업은 상동의 소득수준을 리드하는 경제의 젖줄이었다. 그러나 “중석” 혹은 “텅스텐” 하면 우리는 왠지 제한적인 생각들에만 사로잡히는 모순을 겪게 된다. 이를테면 헬멧에 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곡괭이를 든 광부들의 모습이나 스테인리스 밥사발 같은…
단순한 1차산업의 현장인 줄만 알았던 그곳에서 산업을 일군 ‘삶’의 이야기들이 사물을 통해 망각의 저편으로부터 귀환한다. 귀환할 뿐만 아니라 강한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청하고 있다. 보물도 아닌 쓰레기 보관소인 그의 창고는 기억의 창고다. 중석 광업소의 폐허에서 틈틈이 발굴해낸 오브제들을 컨테이너 창고에 보관하면서 역사의 편린들을 찾아내고 조명했다는 것이 이번 발표작의 가장 큰 의의가 되겠다. 이런 사물들의 원래 주인들은 산업의 현장에서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노라 날마다 그들이 다루었던 사물들을 객관적으로 혹은 역사의식 속에서 바라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직원들이 맡긴 막도장은 닳고 닳은 채 흙 속에서 발굴되었는데 희미하게나마 그들의 이름이 남아있다. 그들은 중석 산업의 퇴보와 함께 시간의 뒤안길로 홀연히 멀어져 갔다. 그래서 의미의 발굴은 세월이 흘러서야 그것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황하율은 작품을 감성적 터치로 풀어냈다. 자칫 딱딱한 재현이나 형식주의로 빠질 뻔했던 사진에 부드러운 계조를 입힘으로써 단순한 정물의 사실적 묘사만이 아닌 감각적 표현으로 승화했다. 가난을 탈출시키던 경제부흥 시대에 대한 고찰, 냉철한 즉물적 표현을 하면서도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화면을 부드러운 계조로 감싸주고 있다.
한국의 광업 분야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대개는 막장에서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고된 사역을 하는 광부들을 기록해왔다. 그러나 황하율은 사람이 아닌 사물을 통해서 역사를 재조명했다. 여기에는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브라질 금광 같은 스펙터클 함과는 전혀 다른 감회가 남는다. 흥미로운 사물들 가운데는 광물을 실험하는 시약병, 물에 젖은 녹음용 릴 테이프, 광부들이 커피를 마시던 종이컵 ('금성'이라고 찍힌), 교육용 8mm 영화필름과 오디오 테이프. 마치 크록스 슬리퍼를 연상하게 하는 구멍 뚫은 고무신. 미처 현상하지 못한 컬러필름 등이 등장한다. 외부인들이 막연히 상상해 온 전형적인 광산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만의 세계에서 일상이 되었던 모든 활동과 문화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화석화되어있다. 대한민국 다큐멘터리의 대다수가 현장에서의 순간 포착을 중시하고 있다면 황하율의 스타일은 aftermath, 즉 상황이 종료된 후의 증거물들을 찾아 자신의 스타일로 재가공한 뒤에 공개하는 방식으로 역사에 접근했다. 재현과 해석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글_ 장일암(사진작가, 생각하는 사진 원장)
no2
no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