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MIN JU
낮 꿈
낯선 기류에 나의 내면이 내던져져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감정 표현에 서투른 나인지라 그때의 멋쩍음이란..
때론 어색한 감정들에 휩싸여 어떤 말과 행동을,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되어
머릿속이 새하얘지기도 한다.
그런 상황을 외면하고 싶다
회피하고 싶다.
그 때문이였을까. 나는 무력감, 감정과잉 등으로 지칠 때 꿈으로 도피한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 탈피하고 싶어서.
그것은 무언가 해결되길 바라서가 아니라 그냥 시간이 흘러
깊은 곳으로 꺼져 내려가는 이상한 감정들을 덮어둘 시간이 필요해서이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일상이 잔잔하게 동요 없이 흐르게 되니까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면
그 같은 시간들을 되풀이 했던 것 같다.
윌리엄 디멘트는 ‘우리는 꿈을 진짜처럼 경험한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꿈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가.
때때로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현실 감각을 잃을 때도 있고,
오래된 기억들 중 그 것이 꿈이였는지 아니면 현실의 기억인지 혼동이 올 때가 있다.
현실은 감각 정보에 의존하는 뇌의 활동이라 한다.
악몽을 꾼 직 후 팔과 이마에 손을 얹어 봄으로써, 현실임을 인지하는 것도 그러하기 때문인가 보다.
때로는 실재 같은 꿈을 꾸기도 하고, 꿈같은 현실을 경험하는 순간을 맞이할 때도 있다.
가끔 의문이 든다.
나는 현실에 존재할까?
나는 어느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현실에 존재하고 싶은가.
이력
2016.9 ~ 2018.6 부산대 평생교육원 디지털 사진 아카데미 수료
2018.2 ~ 표현반 수강 중
2019.9 제 3회 부산국제 사진제 우수 포트폴리오 수상
2019.6.7. ~ 6.17 사진나무 숲 부산프로젝트 No.1 “subway” 단체전 참가 in 부산예술회관
2018. 8.11 ~ 9. 2 제 2회 부산 국제사진제 BIPF 부산대 평생교육원 디지털 사진 아카데미 단체전 참가
in 부산 디자인센터
2017.9.1.~ 9.3 부산대 평생교육원 디지털 사진아카데미 중급반 수료전 “등대가 있는 풍경” 단체전 참가 in 해운대 문화회관
kimminju_1
kimminju_2
Kim Joo Hee
PARADISO
우연한 공소 촬영으로 인하여 나의 작업의 소재는 공소가 되었다.
천주교 신자이지만 그 당시 냉담자였던 나는 단순한 신앙심으로 아무런 갈등 없이 숙명인양 받아들여 삼 년여 동안 묵묵히 작업에 임했었다.
나의 종교는 천주교와의 일상적인 교류 속에서 순수히 받아들여지는 종교가 아닌 항상 물음표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었고 이러한 의문 속에서 현재 이뤄진 교우촌을 대상으로 사진작업을 진행하면 나의 종교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하면서 교우촌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접한 다리실 교우촌의 첫 모습은 다른 시골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현 사회의 노인문제, 농촌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시골 농촌의 모습이었다.
저번 작업과는 다르게 이번 작업은 사람들을 담는 작업이다.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부족한 나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길을 이끌어 주시리라 믿고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집을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이들의 생활을 가식 없이 촬영하면서 생활 속에 녹여진 신앙을 촬영하였다.
동트기 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어나자마자 기도로 생활을 시작하는 성실한 삶, 하느님을 향한 항구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늘 기도 안에서 생활하시는 모습들이다.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는 종교적 삶이랄까.
이 작업 중 나의 주제는 평화로움이 되었다.
부족한 사진작가에게 주신 선물, 평화…….
천호산 자락, 다리실 공소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 ‘평화’를 주제로 교우촌 신자들이 모습을 통해 표현하였다.
17
26
Sim Kyu-dong
나에게 고시원은 희망이었다. 서울 생활을 해보겠다고 무작정 고향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고시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고시원은 원래 고시생들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거주 형태로 시작했지만,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면 살 수 있어서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곳에 머물던 나에겐 당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처음 본 사람에게 ‘저 고시원 살아요.’라고 말했고, 그는 ‘고시 준비 중이에요?’라고 물었다.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마치 내 공간이 부정당한 듯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보편적인 반응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시원에 고시생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계기로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고시원을 찍기 시작했다. [고시텔] 작업은 10개월간 고시원에 거주하며 진행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허락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촬영은 셔터 소리만큼 한순간이었다. 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부감으로 찍었다. 또한 부감이 공간을 보여주기에도 적합했다. 사람들에게 촬영 전 천장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같은 멘트를 하고, 타이머를 누르고 방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모두 다르게 포즈를 취했다. 촬영하며 친해질수록 내가 이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나는 경제적, 심리적 한계에 도달했고, 계획보다 앞서 작업을 중단했다. 그때는 이 사진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이 사진은 너의 것이 아니고 공공의 것이라는 선배 작가의 말로 인해 세상에 보이게 되었다. 부감 사진만으로 보여주고 싶었지만 사진 작업이 부족하여 다른 사진들까지 포함했다. 결과적으로 더 풍성해졌다. 전시하고 기사가 나면서 고시원에 살거나 살았던 사람들의 연락을 받았다. 위로받았다고 했다. 그들은 [고시텔] 작업으로 일상의 큰 변화는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고시원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면서 유대감과 비슷한 마음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Sim Kyu-dong. Gositel. korea. seoul. 2016 (1)
Sim Kyu-dong. Gositel. korea. seoul. 2016 (2)
Joo Yongseong
지나버린 것이 남긴 풍경과 사회적인 문제, 특히 정치적이고도 사회적인 죽음에 관심을 두고 사진을 찍고있다. 개인전 <소리 없는 밤, 짙은 어둠으로 남았다>(2018)와 <애도공식>(2018)을 열었고, <어쩌다 이런 곳까지>(2015), (2016), <철-인>(2018) 등 여러 단체전에 참여했다. 사진집 (2020)를 펴냈다.
www.jooyongseong.com
미군 위안부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 기지 주변으로 생겨난 기지촌에는 ‘양공주’, ‘양색시’와 같은 말로 불린 많은 여성이 미군들을 상대로 한 윤락업종에 종사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을 공식 명칭으로 ’미군 위안부’로 불렀다.
1960년대에는 기지촌 미군 위안부들의 수입이 대한민국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해 이들을 ‘애국자’ 또는 ‘산업 역군’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상당수여성은 자발적인 유입이 아닌 인신매매로 끌려와 일하거나 자력으로는 기지촌을 벗어나기 힘든 상태에서 끔찍한 인권침해를 당했다.
정부는 기지촌에서의 성매매는 예외적으로 허용하며 공무원들이 정기적으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 격려와 교육을 하도록 했고, 지정된 보건시설에서 주기적으로 미군 위안부들이 성병 검사를 받도록 하는 등 직접 운영·관리에 관여했다.
법원에서 군사동맹 유지와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미군 기지촌에서의 성매매를 조장한 국가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지만, 미군 위안부를 ‘외화벌이 애국자’로 치켜세웠던 국가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주용성_미군위안부_0002
주용성_미군위안부_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