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 kwonil
파리 드로잉 paris drowing
17C 프랑스는 유럽문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이것은 도시를 형성하는 공원과 정원의 조성 형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기하학으로 조성된 프랑스식 정원에서 자연은 통제의 대상이었다. 17C 프랑스 정원은 축이 존재하며 중심에 건축물이 조성되어있다. 강한 축의 직선, 절대왕권을 상징하는 장엄한 규모, 자수화단(parterre) 등이 프랑스의 정형적 정원의 특징인 셈이다.
최초의 평면 기하학적 정원은 인간의 정신세계가 자연보다 우위에 있다는 가치관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주의 선구자인 생시몽이 베르사유를 평하면서 "자연에 대한 폭거"라고 한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이 너무 강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파리를 여행 중 많은 공원과 도심의 숲속을 걸었고 즐비한 가로수는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하였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지속해서 자기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자연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미를 추구하는데 충분한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조형언어를 지향하는 이들은 자연을 찬미하고 있다. 특히 자연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생명의 형태가 무한하게 변화해 감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일정한 방향으로 심어 축을 만든 가로수에 주목한다. 직선의 연속이 휨으로써 이루어낸 자연의 선은 곡선이고, 물리적으로 거리감을 가깝게 나타낸 효용의 길이가 직선이다. 경계선을 쳐 놓은 듯 기하학적으로 재단한 가로수는 지배의 선으로서 엄격히 외부로 벗어남을 통제하고 있다.
한 획으로 그은 직선은 단순함의 극치이다. 그러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분화의 반복으로 생성된 직선과 곡선이 혼재되어있다. 뒤엉키듯 만들어 낸 여유의 틈은 밀도감으로 살아나고 텅 빈 하늘 공간과 대조를 이뤄 더욱 단순미를 강조하고 있다. 명확한 공간 구분의 접점에서 냉철함이 살아나고 기하하적 작도법, 여백과 채움, 권위적인 대칭축, 엄격함의 요소는 외유내강의 정신에 비유된다.
권해일 Kwon Hae Il
스펙터클 이후의 공간 Space After Spectacle
산언덕 판자촌을 밀어버리더니 부촌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아파트가 들어섰다. 강 건너 번쩍이는 동네와 가깝다고 웃돈이 붙길래 나는 경쟁에서 질 것 같은 기분에 기어이 한 모서리를 사고 말았다. 숫자가 붙은 허공에 지어진 네모 한 칸은 법적으로는 내 집이지만 나는 불안하다. 집을 사면서 나는 벌써 팔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기 드보르(Guy Debord)는 나 같은 놈이 세상에 넘쳐 날 것임을 50여 년 전에 경고했다. 그는 고유의 가치를 상실하고, 상품 물신의 형태를 ‘스펙터클’이라고 했다. 스펙터클은 우리를 더는 이성과 감성이 작동되지 않는 구경꾼으로 전락시켰다. 우리는 우리끼리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스스로 소외시킨다.
그 사이 아파트는 스펙터클의 표상으로 성장하고 있다. 공사장 바닥에는 암호 같은 숫자와 기호, 약호들이 난무하다. 외벽 전체를 둘러싼 가림막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추려는 것이 분명하다. 전선들은 어디로 연결되는지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뒤엉켜 있고, 가느다란 철골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가 연결된 후 걸쭉한 시멘트로 덮여진다. 어제의 바닥이 오늘은 천장으로 변하고, 매끈했던 면에는 하루 만에 돌기가 솟아나 있다. 아무런 규칙 없이 보이지만 복잡한 질서에 매몰되어 보지 못한다. 세상은 나와 우리를 어떻게 교란시키는가? 스펙터클의 과정도 그 결과만큼이나 스펙터클하다는 것! 나는 불안과 구토를 느낀다.
나의 사회적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만큼 지적이지 못하기에 사진으로 말하고 싶다.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라는 사실! 우리는 강요 없는 선택의 역사를 가지지 못했기에 세속화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주도면밀해지려고 노력한다.
양룡 Yang, Ryong
흐릿한 이미지, blurry Image
사실성과 익명성은 미학적 예술 체제에서 일어난 변화로 ‘사실성’과 ‘익명성’의 두 가지 관계의 확장에서 출발한다. 때로는 사실적인 것과 은유적인 것의 관계는 정치적인 것과 미적인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오늘날 ‘일상화되어 버린 풍경’은 사실적인 것과 정치적인 관계로 그 미학적 가치는 별로 인기가 없는 보편적 주제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매체의 기억방법과 기억형식의 한계성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현대예술의 사진상 표현은 늘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 왔지만, 사실적 표현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그 사실적 표현 방법으로 인해 기계 예술의 장르는 ‘재현예술’의 개념에서 그 확장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흐릿한 이미지>를 통해 기술보다는 감성에 기초해 사실적 표현으로 일상화된 풍경 속 장소들을 찾아 감성적으로 재현된 풍경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흐릿한 풍경은 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편견 없이 세상을 비춘다. 이렇게 차별 없는 흐릿한 풍경의 장소들은 따스한 온기를 뿜으며 그 빛은 나의 영혼을 치유하는 빛으로 표현되는데, 또렷하고 선명한 사실적 풍경들과 배치되는 익명성의 풍경들은 흐릿한 흐림의 미학으로 대상과 대상과의 경계를 잇는다. 이는 흐릿한 이미지 내에 다양한 이미지를 구성하는 경계를 포함하여 기억을 끄집어내게 된다.
나의 작업 <흐릿한 이미지>에서 기억을 촉발하는 매개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장소’로 등장하는데, 일상적인 풍경과 감각적으로 기억된 이 ‘장소’들은 첫 느낌의 시각적 언어를 통해 다시 쓰기로 이어진다. 흐릿한 풍경을 중심으로 ‘장소’들은 내가 어느 곳에 있는지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재구성한다. 여기서 <흐릿한 이미지>에 의존하는 기억들은 결국 모호한 상태로 끝나지만, 그러나 이 모호함을 드러낸 흐릿함의 미학은 여전히 기억행위를 통한 `다시 쓰기`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성을 기반으로 하는 또렷함이 그 대상의 내면성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흐릿한 이미지에서 얻을 수 있는 흐릿한 풍경의 기억들은 예술이 아니었던 익숙한 풍경인 것들이 예술의 체계 안으로 편입하게 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유희영 YOO HEE YOUNG
앗제 스타일의 초상
카메라의 서정 시인으로 파리의 거리풍경과 쇼윈도우, 조각상 등의 작업을 한 프랑스 사진가 으젠느 앗제의 미적 태도는 사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화가나 건축가들의 밑 작업을 위한 자료 사진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건 앗제의 사진에서 보이는 문, 문고리, 계단, 난간과 같은 주제들은 건조한 주제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서 보이는 내면적 태도는 절제된 미학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예술의 발전이라는 개념은 새롭지만, 이러한 역발상의 흐름은 미술사나 역사적 흐름에서도 존재해왔다. <앗제 스타일의 초상> 작업에 대한 개념은 ‘매체로서의 사진’으로 앗제 스타일에서 풍기는 고전적 향수는 검프린트를 통해 재현했고 작업 대부분의 공허함은 절제된 색감으로 채웠다.
작업 ‘앗제 스타일’은 ‘사물의 초상’처럼 사전적이고 고전적이다. 이른 아침 분위기처럼 가라앉아 있는 공간감의 독특한 특징에는 장시간 노출처럼 희미한 빛의 감각, 표면 세부 사항보다 공간과 분위기를 제압하는 시각,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의도적으로 피하는 제한된 장면의 범위를 포함한다.
아울러, <앗제 스타일의 초상>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가상적 공간을 창조하게 되며 매체에 따라 예술창작 방식이 변화되어 새로운 추상 이미지가 생성되면서 현대예술에 관한 미적 개념의 본질 변화를 가져오기 위함이다. 또 작업의 흐름을 확고하기 위해 앗제의 현실적 공간을 가상공간으로 재현시킴으로 가상의 세계가 현실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이 이중적 시각은 앗제의 미학적 시점에서 창조적 주체인 작가로 인해 실존적 존재로 환생 되는 것이다. 특히 앗제 스타일을 만드는 이미지는 상호작용에 관한 작품으로 공감각적으로 표현하고 더불어 가상의 공간감적 이미지를 표현함으로 관람자가 이야기를 무한 확장하게 해 해석이 가능하도록 시도했다.
이성균 Lee, Sung Kyun
빛의 팔레트
나의 작업은 빛의 페인팅이며 빛의 혼합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나의 시점에서 사진예술은 바라보는 사물을 표현할 때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기에 기초한다. 화가의 팔레트는 기본적인 색의 조합으로 다양한 색으로 만들어진다. 이렇듯 화가의 손안에 작은 팔레트에서 작가만의 새로운 색을 창조되듯이 나의 사진 작업은 만약 빛을 혼합한다면 그 색은 어떻게 변할까? 라는 고민에서 시작한다.
사진은 빛으로 만들어지는 기계 예술이다. 이 빛들은 사진매체의 기계적인 예술인 탓에 기계적 조작방식으로 그 표현의 방법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사진 작업은 빛의 혼합과 빛의 표현이다.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 등을 나만의 팔레트 위에서 빛을 조합해 우리 시각으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색을 표현한다. 이 빛의 색감들은 나의 작업의 주된 의도이고 표현되는 오브제들은 빛의 색감을 읽히기 위한 작가만의 시그널이다. 다양한 빛의 혼합은 새로운 색감을 경험하게 되는데 오브제를 감싸는 빛의 색감은 공간의 변형으로 느끼게 된다. 즉 공간 색감의 혼합이 공간의 느낌을 변형시키고 변화를 초래하기를 의도하고 있어 색감의 의미들을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표현은 기존의 빛의 인식과는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가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것은 공간의 기능적인 측면과 아울러 공간에서 맴도는 빛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이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의미들이 공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업은 '빛의 혼합'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에서 바라보는 것을 통해 지각하게 된 빛의 존재가 내면 공간의 소통 매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빛의 채색은 공간에서 빛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빛에 의해 서서히 변화하는 공간에서 감정을 느끼며 표현된다. 이러한 표현은 '빛의 혼합'이 가지는 의미를 되돌아본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어지는 의미와 표현 방법은 손에 잡히지 않고, 형체가 있는 다른 사물이나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도상의 본질을 은은하게 드러낼 뿐이다. 그 실체는 도상은 표현한 빛이 어떠한 형태를 보이는가? 또 빛의 채색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의 의문에서 출발하고 흘림과 채색의 모호함은 실질적인 사진가로서의 관조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몸의 언어이며 미학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성균 CHOI, JEONG-HO
멀어질수록 아린 Hurtful as being further away
이번 작업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멋스러운 한복에서 시작된다. 한복의 역사가 만들어낸 지혜와 개성이 녹아든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선, 색에 현대인이 가진 미디어적인 문화를 접한 이미지가 작업의 시작이 되었다.
오월은 오방색과 한복의 맵시가 극대화되는 최고의 시기이다. 예부터 오월을 수릿날, 천중절이라고 하여 년 중 최고의 달로 여겨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윤복의 “단오풍경”을 보면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멀어질수록 아린”은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눈에서 멀어지면서 빛에 의해 흐릿하게 인식되는 모습들이 그려졌다. 그것은 마치 바람을 따라 멀어져 가는 한 쌍의 나비 같았으며, 그 순간은 멎은 듯 영원처럼 환상에 젖어 들기도 하였다. 또한, 눈앞에서 사진으로 존재하는 대상에서 실체적 사물이 멀어지면서 빛에 의한 환영적 흔적만 남게 되었다.
어떤 대상이 시각적 요소에서 감성적 요소로 바뀌는 순간의 과정에는 찰나의 환영이 존재한다. 그 환영이 개개인의 감성 정도에 따라 다소 몽환적이거나 사실적 요소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대상을 구체적으로 들어내지 않음으로써 감성적 요인은 또 다른 깊이의 극대화된 환영으로 인식되어서 질 수 있을 것이다.
탁영한 TACK YOUNG HAN
‘현(玄)과 흑(黑)’
수묵화는 단순히 사물의 조형미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린 자(者)의 마음을 찾아내어 읽는 그림이다. 옛사람들은 ‘그림을 본다(看畵)’라고 하지 않고 ‘그림을 읽는다(讀畵)’라고 했다. 화려한 색채를 배제하고 묵(墨)을 통해 형상의 외형보다는 내면을, 즉, 작가의 내면세계를 소우주적 공간인 화선지에 표현하는 것이 수묵화이다.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으로 빛과 색채에서 발현된다. 색채를 제거한 무채색으로 (黑)과 백(白)의 대비와 농도로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흑백사진이다.
나의 ‘현(玄)과 흑(黑)’ 시리즈는 나의 논리적, 이성적인 시선이 아닌 감성적, 은유적인 내면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현(玄)과 흑(黑)’ 시리즈는 사진의 사실적인 외형묘사를 제거한 추상표현주의 양식과 전통적인 회화 양식인 수묵화 형식을 빌려 한지(韓紙)에 표현한 것이다.